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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 2장 13-16절
1단계
북부군의 총사령관이자 펠릭의 장군이었던 로마의 장군이 어쩌다가 노예가 되었을까요? 그가 모시던 왕이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영화에서 나온 황제가 그 살인범이죠. 새로운 황제는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하지만, 선왕의 충복이었던 주인공 막시무스는 거절합니다.
거절의 댓가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거절 즉시 근위병들이 자신들을 죽이려 했죠. 위기의 순간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가까스로 탈출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냉혹한 현실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고향에 가보니 남은 것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불타버린 아들과 아내뿐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천하를 호령하는 로마의 총사령관에서 노예로 전락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 것 같으세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왕의 최측근으로 있던 자가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바닥으로 추락한다면 그때의 그 기분은 어떨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럴 때 자살을 택하죠.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희망의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러나 막시무스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살아야만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살아서 ‘내가 모시던 왕을 죽이고 내 아내를 기만하고 아들을 불태워 죽인 황제를 죽이리라’란 생각으로 날카롭게 다가오는 칼날의 공포와 고통을 온몸으로 다 받아냅니다.
2단계
막시무스도 살아야할 이유를 못 찾았다면 그도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최근에 출판된 책 중에 이런 책이 있습니다. ‘일단 태어났으니 산다’ 기안84도 이런 말을 했죠. “태어난 김에 산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저냥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삶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 좋겠죠. 하지만, 살아야하는 이유도 없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겠죠.
막시무스는 복수를 이루었을까요? 한낱 노예가 황제를 죽이겠다는 그 복수를 이뤘을까요? 그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황제와 1:1로 결투를 벌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그는 자신의 칼로 황제의 심장을 꿰뚫습니다. 복수에 성공한 것이죠.
3단계
성경에도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도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도 부자였고, 배울 만큼 배웠고, 그도 출세의 길을 달리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남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저 사악한 무리들, 예수라 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자신의 온 열정을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데 쏟았습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태양보다 밝은 빛이 나타나 자신에게 이르기를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바울은 말했죠. “당신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이런 말이 들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뒤통수가 뻐근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줄 알았는데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니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도 막시무스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윗 공기만 마시다가 그의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동안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핍박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몸둘 바를 알지 못해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죄송스러운 마음이 큰 파도처럼 몰려들 무렵 그에게 한 가지 묘안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을 핍박했던 것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자. 그리스도인들을 죽인 것만큼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자” 목표가 생겼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처럼 그의 달음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부활 곧 복음의 사실의 진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세 번 갑니다. 그 길이 지금처럼 비행기타고 하루면 가는 길이 아니라, 걸어서 한두 달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점은 무의미했습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했죠. ‘내가 전하는 복음이 내가 전파하는 부활이 옳은가? 옳다면 난 복음을 전하는데 내 삶의 목적을 둔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난 끝까지 달려간다. 내 비록 예수님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목숨이 위험하고 결국 죽는다 할지라도 난 내 삶의 목표대로 살아갈 것이다. 난 복음을 전하는 사도이다.
영화에서 본 막시무스와 바울의 공통점은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이겨내고 끝까지 달려갑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태어난 김에 살지 말고 삶의 목표를 두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목표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사실 삶의 목표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그 뜻대로 살아가길 바라시죠.
여러분도 삶의 목표를 바울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목표를 선정하길 바랍니다.